세상 사람들과 맺게 되는 인연이 천차만별, 기기묘묘하듯이 책과 맺어지는 인연 가운데서도 유별난 것들이 있다. 그 책에서 얻은 지식이 너무 풍부해서, 그 책이 주는 감동이 너무 깊어서, 또는 그 책의 저자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어서 등등 어떤 책을 각별히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책과 맺게되는 인연은 거의 대부분 그 책을 읽거나 감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주 내가 두고두고 각별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책 한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실은 이 책을 받아들고 매우 흥분했었다.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는 순간 책을 펼쳐 보기도 전에 흥분이 밀려왔다. 책 제목은 '유럽의 명문 서점'이다.

유럽의 명문 서점 - 10점
라이너 모리츠 지음, 레토 군틀리아지 시몽이스 사진, 박병화 옮김/프로네시스(웅진)
내가 의도치 않았고, 이 책이 한국에 번역출간되기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이 한국에서 나오는데 나오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이 책 어딜 펼쳐봐도 내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나를 계기로 어떤 책이, 그것도 예쁘고 고급스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연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가을 나는 국제 도서전을 취재하기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던 길에 프라이부르크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거니와 거리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서점은 두고두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게으르고 무덤덤한 편인 내가 아래와 같은 호들갑스러운 방문기록을 남겼으니 그 느낌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동네 산책]프라이부르크 '숫돌서점' 이야기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 글을 쓰기 위해 관련 정보를 여쭸던 분이 <유럽의 명문 서점>이라는 책을 번역출간한 출판사의 대표이시다. 내 부탁으로 '숫돌(처럼)서점'(Buchhandlung zum Wetzstein) 관련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태리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에 있는 '명문' 서점 20곳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물론 숫돌서점도 포함돼 있다. 저자가 명문서점의 기준을 명시적으로 밝히짖는 않았지만 대체로 역사가 길고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 곳을 골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이렇듯 크든 작든 간에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서점 스무 곳을 골라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였다. 서점 하나 하나의 개성을 들여다보면서 다양한 면모를 지난 열정적인 주인장들을 만날 수 있다. 밀라노의 출판인 잉게 펠트리넬리가 언젠가 말했듯, 무엇보다 "고객을 유혹하는" 서점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건축 면에서 걸작이라는 평판을 듣는 곳도 있고, 외진 곳 깊숙이 자리 잡아 피난처 구실을 하는 곳도 있으며, 시대 조류에 반발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가 하면, 놀랍도록 창조적인 정신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숫돌서점 내부 모습. <유럽의 명문 서점> 저자는 이 서점의 내부 분위기가 마치 서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고 표현했다.

이제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영국에서 몇달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 유명하다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이 있는 곳에도 당연히 가보았다. 프랑스에도 잠깐 들를 기회도 있었다. 지나놓고 생각해보니 유럽을 가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는 곳마다 서점을 빠뜨리지 않았던 것 같다. 유럽의 서점들은 대체로 책들이 독자를 압도한다기 보다는 나름 도도한 포즈를 취하고 선채 이래도 나를 한번 서가에서 뽑아서 보지 않겠느냐고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럽이라고 해서 전자책의 파고가 비켜가거나 오프라인 서점이 마냥 활황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의 모든 서점들이 다 선전하고 있을리는 만무하다는 뜻이다. 오프라인 서점의 퇴락의 속도가 우리보다 더딜순 있어도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상은 비슷할 것이다.

이제 '서점'이라는 공간은 우리와 동시대에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왠지 향수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년전 번역된 <노란 불빛의 서점>이라는 책이 있다. 오랫동안 서적상을 했던 지은이가 책과 서점에 얽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나갔는데 나에게는 '노란 불빛의 서점'이라는 제목이 내용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상쾌한 밤 공기 속 노란 불빛을 받으며 고즈넉히 손님을 기다리는 서점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괜시리 먹먹해지는 것은 왜일까.

노란 불빛의 서점 - 10점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문학동네

여하튼 내가 죽기전 <유럽의 명문 서점>이라는 책이 소개한 서점 20곳 가운데 몇곳이나 가볼 수 있을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숫돌서점 한군데라도 가봤다는 것이다. 헌데 꼭 가봐 무엇하리. 이 책의 페이지들을 야금야금 넘기며 마치 내가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을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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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모자란 것들이 여러가지 눈에 띈다. 재력이나 외모 같은 사회적으로 각광받는 요소들은 물론이거니와 '아, 이런 걸 좀 잘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움이 드는 능력들 말이다. 이런 것은 아마도 사회적인 기준에서 느껴지는 결핍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개인적 취향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내 출입처의 내 책상 위 자그마한 책꽂이엔 이런저런 자료들과 책 몇권이 꽂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못말리는 일러스트 백과'라는 책이다.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러스트 기법들을 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연습해 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언젠가 시간이 좀 나면 끄적거려볼까 하는 생각에 꽂아두었다.

안그런 사람 없겠지만 어렸을 적 나도 그림 꽤나 그린다는 소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려서 그런 칭찬을 들었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학교교육에 잘 순응하는 '착한(척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예체능 수업에 대한 비중이 확연하게 줄어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그림 또는 미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그려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강제로 키워졌던 그림 실력이 완전히 퇴화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가 제대로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무슨 전시회, 이런 데를 찾아다녔다는 것은 아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20개월 가까이 어린이 책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어린이 책에 담긴 일러스트레이션들을 감상했던 것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는 대충 비슷하겠지만 어쩌다 재수가 좋아서 부모님이 외판원을 통해 큰맘먹고 사주는 세계동화명작동화류의 딱지본 전집 외엔 별로 감상할 만한 어린이 책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선 그야말로 신천지가 펼쳐진 듯 했다.
 
처음엔 감상과 평가의 포인트를 몰라 어린이 책 편집자들을 귀찮게 하기도 했다. 여하튼 매주 쌓이는 어린이 책들을 일별하다가 내가 보기에 좋아보이는 책은 아이에게 갖다 주고, 읽어주기도 하다 보니 나라별로, 혹은 작가별로 어떤 특징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김홍모 작가는 어린이 책에서 먼저 만난 작가는 아니었다. 김 작가는 지난해에 다른 작가들을 규합해 용산 참사에 관한 옴니버스 만화집을 냈다. 그 유명한 <내가 살던 용산>다. 당시 김 작가를 인터뷰 했다. ('용산참사 1주기 맞아 르포만화책 출간 김홍모씨' 인터뷰 보기)

내가 살던 용산 - 10점
김성희 외 지음/보리

김 작가는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본인의 정체성을 만화 쪽에 더 두고 있는 듯 싶었지만 한국에서 만화만으로 먹고 살기는 어려운 법이다. 인터뷰 제안이 고마웠는지 김 작가는 보리에서 낸 5권짜리 연작 만화집을 한질 들고 왔다. 그 후로 김 작가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글 작가의 스토리에 그림을 입혔고, 단독으로는 만화를 그렸다.

지난주에 김 작가가 참여한 그림책이 또 한권 나왔다. <할머니의 제삿날>이다. 여차저차 해서 이 책이 내 손에(정확히는 내 아들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은 단순한 그림동화라기 보다는 한국의 전통 풍습이지만 최근들어 급속하게 퇴조하고 있는 기제사와 차례 지내기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지식다다익선'이라는 시리즈의 한 타이틀로 내놓았다. 차제에 우리 아이 책장에 꽂혀 있는 김홍모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해 보았다. (이런 호사스런 기회를 주신 출판사 분들께 감사 인사를 먼저 드린다.)

할머니 제삿날 - 10점
이춘희 글, 김홍모 그림/비룡소

행여나 작가에게 이런 얘기가 들어가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김홍모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아, 나도 그림을 좀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작가가 들으면 어처구니 없어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작품을 보면 내게 이런 욕심이 생기고, 그 이유는 그의 그림이 무척이나 쉽고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홍모 작가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것으로 안다. 내가 느끼는 편안함은 아마도 그의 이런 이력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예에서 보더라도 채색 동양화는 어린이 책과 매우 높은 친화력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 한편으론 김 작가의 작품들에서 변주돼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외형이 매우 친근하다.
 
대체로 어린 주인공은 눈매가 크고 둥글하지만 얼굴도 크고 둥글며 헤어스타일도 매우 서민적이다. 남자 아이의 경우 까까머리이거나 대체로 짧은 머리이며, 여자아이도 단발머리이거나 묶은머리일 경우가 많다. 김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갖는 이와 같은 친서민성은 <오늘의 날씨는>이라는 연작동화집에 실린 삽화에서 두드러진다.

오늘의 날씨는 - 10점
이현 지음, 김홍모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위의 그림에서 보듯 수묵은 배경을 잔잔하면서도 거칠게 갈무리하는데 사용됐고, 인물이나 포커스가 되는 사물은 색과 선으로 디테일을 살려줬다. <오늘의 날씨는>은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마을이 배경이다. 가난하지만 서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이웃들이 주변의 대규모 아파트 공사 때문에 밀려날 위기에 처한다. 세상물정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는 아닌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비정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옹다옹 어깨를 맞대면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서 완전히 온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김 작가는 남루하지만 그래도 정이 살아 있는 이들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소재에 대한 그의 시선이 그만큼 따스하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이든 미술작품이든 작가의 모습이 등장인물에 어느정도 배어든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모든 작가들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김홍모 작가에겐 어느정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굳게 해준 것은 <누렁이의 정월 대보름>이라는 작품이다. 위의 인터뷰 기사에 딸린 작가의 사진과 아래의 등장인물을 한번 비교해 보시라.


누렁이의 정월 대보름 - 10점
김미혜 글, 김홍모 그림/비룡소



동글동글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게 개구쟁이의 모습 그대로이다. 한겨울 추운지도 모르도 천방지축 뛰어놀다보니 약간 얼어 발게진 볼과 코, 그리고 시원하게 빠진 앞니 등 미소가 절로 나온다. 이 장면 역시 소 우리 뒤편의 나무를 수묵화 기법으로 처리됐다. <누렁이의 정월 대보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누렁이가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정월 대보름에 우리네 조상은 나물을 해먹고 쥐불놀이 같은 여러 풍습을 지켰는데 개들은 불행했다. 꽉 찬 달을 개가 갉아먹었다는 전설 때문에 정월 대보름엔 개를 굶겼다고 한다.


개로서는 억울하고 황당한 노릇이다. 누렁이의 저 불만가득한 표정을 보시라.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누렁이의 심리를 저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김홍모 작가가 만화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주니어김영사에서 <게으른 고양이의 결심>이라는 책을 내면서 귀여운 '게으른 고양이'로 책도장도 만들고 커다란 포스터도 만들었는데 위에 있는 누렁이도 그런 대접을 받기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

어이쿠나 호랑이다 - 10점
임정진 지음, 김홍모 그림/웅진주니어

김홍모 작가가 어린이 책 편집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의 그림체가 전통적인 소재와 잘 어울린다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김 작가는 전통적인 소재 자체에서 기인하는 옛이야기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그것을 익살맞게 구현해내는데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재주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어이쿠나 호랑이다>이다. 아마도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가장 많이 그리는 동물이 개와 호랑이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버전의 개와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는 무서워야 한다. 그런데 너무 무섭게 그려서 아이들이 울어버리면 안되니까 적당히 귀엽게 그려야 한다. 우리 조상들에게 호랑이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루는 <어이쿠나 호랑이다>에도 김홍모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는 동글동글한 아이들이 나와 호랑이와 어우러진다.

마지막은 5권으로 이뤄진 '두근두근 탐험대' 시리즈. 김홍모 작가는 작년에 인터뷰를 했을 때 "학습만화말고 내가 어렸을 적 어린이 잡지에서 봤던 '진짜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이런 꿈을 쫓고 있는 작가들에게 좁게나마 뚫려 있는 숨통이 '개똥이네 놀이터'와 '고래가 그랬어' 같은 몇 안되는 어린이 잡지다. 김홍모 작가는 '두근두근 탐험대' 시리즈를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했던 것으로 안다. 인터뷰 하러 왔을 때 인터뷰를 마치고 "만화를 사랑해달라"는 각별한 부탁과 함께 내게 선물을 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어떤 보답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지만, 내 아이가 침대에서, 거실에서 배깔고 엎드려 '두근두근 탐험대'를 키득거리며,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빚을 약간이나마 갚은 것 같다는 자위를 하곤 한다.

여하튼 나는 김홍모 작가의 그림이 너무나 친근하다. 그리고 조금만 연습하면 나도 조금은 흉내를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되도 않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바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김홍모 작가의 최대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두근두근 탐험대 1 - 10점
김홍모 글.그림/보리

두근두근 탐험대 2 - 10점
김홍모 글.그림/보리


두근두근 탐험대 3 - 10점
김홍모 글.그림/보리


두근두근 탐험대 4 - 10점
김홍모 글.그림/보리


두근두근 탐험대 5 - 10점
김홍모 글.그림/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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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