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 스키너 : 마음의 재구성 - 10점
조숙환 지음/김영사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을 거칠게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언어 기계를 내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 언어 기계에 어릴 적에 어떤 언어가 투입(input) 되느냐에 따라 모국어가 결정된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어린 아이가 어릴 적부터 영어권에서 자라면서 영어에 노출되면 영어가 모국어가 되고, 반대로 앵글로 색슨 어린이가 어릴 적부터 한국어 환경에 노출되면-다시 말해 한국어가 어릴 적에 투입되면-한국어가 모국어로 세팅이 된다는 것이다. 뒤에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매개 변항 이론으로 더욱 간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

촘스키는 원어민들이라면 아동이나 성인 모두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보지못했던 새로운 문장의 적합성을 의미적으로, 통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마음에 내적 언어I-language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내적 언어는 세계의 여러 언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문법이라고 주장한다. 내적 언어가 보편성을 띤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 지식을 스키너-블룸필드식의 경험주의적, 귀납적 논리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73쪽, 플라톤의 문제)

이러한 촘스키의 비판에 대해 스키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스키너가 보이게 선험주의를 주장하는 촘스키의 이론은 비과학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스키너 자신은 '스키너 상자'라는 실험 도구까지 고안해가며 '데이터'와 '증거'를 가지고 말하는데 촘스키는 연역적이고 비과학적인 가설만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는 보이지 않는 체계에 대한 촘스키의 연구는 선험적이며 내재적이기 때문에, 관찰 가능하면서 통제도 가능한 변항들을 이용하는 자신의 연구만큼 과학적이지는 않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스키너의 연구 방법이 마치 범죄자들에게 공권력을 남용하과 징벌로 위협하는 일부 경찰들의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 행동주의 방법으로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75쪽, 플라톤의 문제)

그렇다면 자연환경이 인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인가?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분명히 환경은 인간의 심리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자연환경이 인간 심성의 본질적인 또는 본성적인 것까지 영향을 미치느냐 현상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치느냐가 아닐까.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다른 두 관점으로 탐색할 수 있다. 첫째, 스키너-블룸필드식 '빈 서판' 경험주의 이론이다. 경험론자들이 옳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둘째로, 매트 리들리Matt Ridley, 1958~와 핑커의 견해를 들 수 있다. 리들리와 핑커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지식을 사용하고 서로 협력할 줄 아는 능동적인 주체로, 새로 발견된 것은 축적하고 서로 간의 차이점을 초월해 각자의 역할을 통합함으로써 과거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제도화한다. 리들리와 핑커에게 자연환경은 인간의 마음을 운명적으로 결정해 채우는 원동력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마음에 채워져 있는 본성이 발현되는 데 필요한 '매개체nature via nurture'일 뿐이다. (79쪽, 플라톤의 문제)

만약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 문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갖고 태어나 외국어, 제2외국어랍시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개별적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보편 문법을 공부한다면 전세계 모든 언어에 적용해 쉽게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마치 맥가이버 칼이 다양한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듯 보편 문법이라는 언어 지식만 갖고 있다면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다리어에 맞게, 아프리카에 가면 스와힐리어에 맞게 슥슥 모양을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나는 보편 문법 이론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신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 문법은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었다.

언어의 세계에는 풍부한 창의성뿐만 아니라 한정된 구조적 틀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촘스키가 "우리는 한정적인 수단을 어떻게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했듯이. 여기에서 '한정된 구조적 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촘스키는 이것을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으로 규정한다. 즉 우리가 직접 듣고 말하는 피상적인 언어 형태 저변에 기저 구조가 있으며, 이 기저 문법은 모든 인간 언어를 지배하는 '보편 문법'이라고 규정했다. (…) 여러 나라의 말을 들어보면 서로 확실히 다르다. 그런데 피상적인 표현들의 저변 구조underlying structure를 살펴보면 보편적 특징이 발견된다는 것이 촘스키학파이 주장이다. 마치 해수면 위로 일부만 드러낸 채 떠 있는 빙산의 겉과 밑동의 관계처럼, 겉에서 감지할 수 있는 빙산의 형태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표현하고 듣는 언어 형태는 바람과 태양 등 환경의 영향으로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지만,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받침대로서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킬 바닷속 미통은 인간 언어의 일반적인 보편 구조와 유사한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93~94쪽, 플라톤의 문제)

보편 문법은 어떻게 개별 언어로 연결되는가. 촘스키는 '매개 변항'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앞서 말한 언어 기계를 떠올려 보자. 보편 문법이라는 언어 기계를 처음부터 전기로 구동시키기 시작하면 전기 기계가 되고, 휘발유를 주입하면 휘발유로 작동하는 기계가 되고, 디젤을 넣어주면 그 뒤로는 디젤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된다는 것인데, 보편 문법에 '경험'이 더해지면서 개별 언어의 문법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매개 변항 이론parameter theory을 이용해 언어의 보편성과 각 언어 고유의 특수성의 관계를 설명했다. (…) 매개 변항이란 원래 수학적 개념으로 모집단의 특징을 나타내는 속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인간 언어 구조의 보편적 특징을 의미한다.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 간 차이는 매개 변항화parameterization를 통한 각 문법 구조의 선택에 의해 유발되며 각 언어 고유의 문법 구조의 선택은 경험에 의거해 결정된다. (94쪽, 플라톤의 문제)

매개 변항으로 제시된 머리어, 주어, 기능어, 절의 분기 방향 등은 촘스키학파에서 보편 문법 요소로 간주되는 사례들로서 모두 생득적 언어 지식이다. (99쪽, 플라톤의 문제)

어린이를 키워본 분들이면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 같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아 미술 교재나 유아 학습지 등의 선전물을 보면 피아제 이론을 적용했다는 것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피아제는 누구인가.

장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와 같은 인지심리학자는 언어 능력의 생득성보다는 인지 기능의 선천적 능력을 인정했다. 피아제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과 같은 언어 지식의 생득성에는 반대했으며, 감각운동 지능을 비롯한 여러 인지 능력의 선천성으로 언어 지식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 지식의 내용 중심이라면, 피아제는 인지 능력의 기능functionalism적인 측면을 중요시한 것이다. (103쪽, 플라톤의 문제)

특정 유전자가 특정의 유전적 형질을 담당한다는 환원주의적 유전자관은 이곳저곳에서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 여전히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의 언어 능력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찾기 위한 과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이어졌고, 흥분되는 연구결과도 오래전에 나와 있다고 한다.

사람과 친팬지의 1.25% (유전자) 차이의 수수께끼는 2001년 10월,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에 의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즉 인간은 어느 한 유전자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해 침팬지나 쥐 등 다른 독특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폭스피2FOXP2, forkhead box P2'라는 이름의 이 유전자가 오랜 진화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이 정교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111쪽, 언어 유전자가 있을까?)

FOXP2 유전는 사람뿐만 아니라 침팬지, 쥐 등 여러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모두 있는데, 염기 서열의 미세한 차이가 사람과 다른 포유동물들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즉 이 유전자는 모두 715개의 아미노산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경우 쥐와는 3개, 침팬지와는 단지 2개만 분자 구조가 다를 뿐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는 단백질 모양을 변화시켜 얼굴과 목, 음성 기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뇌의 일부분을 훨씬 복잡하게 형성하고, 이에 따라 인간과 동물의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113쪽, 언어 유전자가 있을까?)


회귀성이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된 'recursion'은 쉽게 말해 반복 또는 되풀이를 말한다. 문장 안에 문장이, 안긴 문장 안에 또다른 안긴 문장이 있거나, 관계절에 관계절이 반복되는 등 반복성이 인간 언어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최근 인지과학계의 화두는 '회귀성recursion'이다. 촘스키는 하우저, 피치와 함께 기고한 2002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언어 구조의 '회귀성'을 재천명했다. 예를 들어, '영이는 [순이가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와 같이 세 개의 저로 구성된문장을 보면, 명사고(예: '영이', '영화'), 동사구(예: '좋아한다', '안다'), 문장('내가 영화를 좋아한다') 등이 반복적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는데, 회귀성이란 이와 같이 동일한 구나 절이 회귀적·순환적으로 산출됨으로써 창의적으로 무한히 생성되는 언어의 특징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언어 구조는 마치 네덜란드 판화가 에스허르Maurits C. Escher, 1898~1972의 1956년 작품 '점점 더 작게Smaller and Smaller'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겹겹이 덮여 있는 양파 껍질처럼, 또는 러시아의 원목 중첩 인형 미트료시카matryoshka 같은 복합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촘스키학파에 의하면 명사구, 동사구, 문장 등의 통사 범주의 '회귀성'은 인간 언어에서만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통사 구조 체계로, 이런 순환적 구조는 선험적으로 습득되는 지식이다. (151쪽, 언어 지식은 미트료시카?)


독자인 우리는 돌고 돌아 결국 매우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왔다. 본성이냐 양육이냐.

인간 언어의 선험주의 혹은 경험주의는 영어 학습의 '노예'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질 수 있다. 꼭 언어 학습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약 언어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면, 반대로 경험에 의해 언어가 습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국어와 외국어의 학습 방식이 각각에 따라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본성이냐 양육이냐 문제는 교육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운영원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흔히 흉악범에 대해 '천성적으로 나쁜 사람' 또는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환경이 범죄자를 만들었다'는 식의 양갈래의 접근을 하는데 본성론과 양육론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지은이는 책 말미에 본성과 양육, 찬 서판과 빈 서판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 상호 작용하며 보완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Nature Via Nurture: Genes, Experience, and What Makes us Human>(2003)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유전적 특징에 의해 고정 불변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양육될 수 있다고 한다. 즉 리들리는 선천적 잠재 능력이 후천적 학습을 통해 발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성과 양육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 되며, 본성이냐 양육이냐의 이분법적 사고와는 무관해진다. 리들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미 10여 년 전에 미국 언어학회 회장이었던 릴라 글라이트먼Lila Gleitman, 1929~ 교수가 천명했듯이, 이제 현대 과학의 핵심 과제는 '본성이냐 양육이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본성과 어느 정도의 양육이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여야 한다. (173쪽, 본성 아니면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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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

촘스키 & 스키너 : 마음의 재구성 - 10점
조숙환 지음/김영사

출판사 김영사가 출간하고 있는 시리즈 가운데 '지식인 마을'이라는 것이 있다.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동서양 지식인 100명을 2명씩 엮어서 고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30권이 넘게 나왔다. 인물과 인물을 대비시켜서 고찰하는 방식하면 강신주 박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작년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한 목침 두께의 책 <철학 Vs. 철학>이 바로 이 방식을 택하고 있거니와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도 이런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고보니 '지식인 마을'의 저자군 가운데에서도 강신주 박사의 이름이 발견된다. 동양철학자들에 대해 3권이나 썼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장회익 교수가 책임기획을 맡고 있는데 해당 분야 전문가나 전공자가 보기엔 너무 기초적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초심자에겐 입문서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적절한 수준이다. 그간 두세권 정도 읽어봤는데 저자마다 약간씩 편차가 있긴 하지만 200쪽 내외의 분량도 부담이 적고, 해당 사상가의 핵심 개념을 적절하게 풀고 있어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염두에 둔 듯한 편집과 목차구성이 좀 눈에 거슬린다.

앞서 정치 또는 정치철학 관련 책들을 연달아 읽었는데 좀 전환을 해보고 싶어 <마음의 재구성-촘스키 & 스키너>(조숙환, 김영사)를 집어들었다. 촘스키는 세계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워낙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고, 스키너는 심리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소할 이름일게다. 촘스키는 좌파 지식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 '보편 문법', '변형생성문법'이라는 독창적인 언어 이론으로 '학파'를 이룬 천재 언어학자이다. 스키너는 이른바 '행동주의 심리학'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촘스키의 비판을 받으면서 대립쌍을 이룬 학자다.

요즘은 약간 시들해진 기운이 없진 않지만 여전히 많이 소개되는 인지심리학이나 인지언어학 책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촘스키와 스키너. 밑줄쳐가며 '상식보충'을 좀 했다.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생각돼 왔고, 다른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금까지도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상징하는 언어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문제는 언제 들여다봐도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성경 창세기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도다'로 시작된다던가. 인지언어학계의 거목이 세워지는 시기는 1950년대. 사실은 세력교체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학계의 스타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촘스키는 기존 학계의 거목을 거칠게 비판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2007년 4월에는 하버드 대학의 과학관에서 인지 혁명 50주년을 기념하고 회고하는 모임이 열렸다. 반세기 전인 1957년에는 스키너의 저서 <언어행동론>이 출간되었고, 그 2년 후에는 촘스키의 반론이 학술지에 게재되면서, 인간이 행동주의가 아닌 본성주의의 시각으로, 즉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조명되기 시작되었다. 50주년 기념에는 핑커와 하우저의 진행으로 밀러, 브루너, 촘스키, 캐리가 한자리에 모여 오로지 행동주의로만 장식되었던 1950년대를 회고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밀러와 촘스키는 당대의 인지 혁명을 인간에 대한 시각의 혁명으로 풀이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극에 의해 조건화되어야 행동하는' 스키너의 그림이 아니었다. 인지 혁명 당시 학생이었던 캐리는 이미 1962년에 행동주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스키너의 그림이 밀러와 촘스키의 표상인 '정보 처리의 능동적 주체'의 모습으로 대체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프롤로그)

지은이는 언어의 작동원리를 짧게 요약하면서 '언어 형태'와 '개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소쉬르의 '랑그(기표)'와 '파롤(기의)'에 다름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랑그, 파롤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이러한 언어의 작동원리를 배워서 써먹는 것이냐, 아니면 태어나면서 언어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냐이다.

'언어 형태'와 그 형태로써 특정한 '개념'을 가리키거나 연관짓는 마음의 작용은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장미'라는 단어를 통해 '사랑'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공감하는 연상 작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언어 형태와 그 형태에 관련된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는 것일까? (15쪽, 경험인가, 선험인가?)

촘스키의 등장 이전 인지언어학계의 주류이론은 바로 스키너의 행동주의. 앞으로 자세하게 설명되겠지만 한마디로 경험에 의해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말은 커녕 옹알이도 제대로 못하다가 자라면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흉내를 내고 술술 말을 배워가는 것을 보면 이런 이론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1930~1940년대를 지배한 이론은 행동주의behaviorism의 조건 형성conditioning 이론이었다. (…)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학습된 것으로 파악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언어 또한 선천적인 것이 아닌 오직 환경에 주어진 경험적 자료에 의한 조건 반사적 행동conditioning behavior으로 간주했다. (…) 행동주의의 주창자로 평가받는 스키너는 블룸필드의 경험주의 시각이 반영된 자극-반응stimulus-response 이론을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 행위 역시 가족이나 이웃과의 의사소통 등 주변 환경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극-반응의 결과로 발달된다는 것으로, 우리의 언어 지식이 축적되고 오류도 수정되는 데는 환경과 경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21~22쪽, 경험인가, 선험인가?)

이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촘스키. 경험을 통해서만 언어를 배워간다면 어린이는 보고 들은 말만 사용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보고 들은 말뿐 아니라 새로운 표현을 창조해 낸다. 마치 바둑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듯이 문장의 확장가능성은 무한대다. 그런데 경험으로 이런 것을 다 습득한다고? 인간이 언어능력을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1950~1960년대에 이르면, 이런 행동주의가 본성주의nativism에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주변의 환경과 경험이 자극이 되어 지식 습득을 촉진한다고 주장한 행동주의자들에 반대해, 경험보다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다시 말해 선험적인 언어 지식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성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20세기 중반의 이러한 행동주의와 본성주의 대립의 주인공은 버러스 스키너Burrhus F. Skinner, 1904~1990와 노엄 촘스키A. Noam Chomsky, 1928~였다. (…) 촘스키는 블룸필드와 스키너의 경험론에서 중요시하는 학습 효과나 오류 정정 효과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언어 저변의 심성적mentalistic 규칙, 마음의 내재적 구성과 창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선험론을 펼쳤다. 촘스키는 질적으로 심각하게 빈약한 자극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이 이토록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구조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은 경험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22쪽, 경험인가, 선험인가?)

뒤에도 등장하지만 스티븐 핑커가 쓴 유명한 책 가운데 <빈 서판>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해 <빈 서판>이라는 단어의 유래와 정확한 뜻을 모른채 꽤 강렬한 제목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빈 서판 대 찬 서판'은 '양육 대 본성'의 논쟁과 일맥상통한다는 설명이 그럴듯하다. 짐작하겠지만 스키너는 '빈 서판파', 촘스키는 '찬 서판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어떤 상태일까? 인간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지식과 잠재 능력을 선험적으로 갖춘 상태일까, 아니면 텅 빈 백지장white paper일까?

로크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에서 인간의 마음을 "어떤 글자도, 생각도 없이 텅 빈 백지장"으로 표현했다. 로크는 백지장의 이성과 지식은 '경험'에 의해 채워진다고 가정한다. 과연 앎의 세계는 로크의 생각처럼 경험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본성주의자들처럼 선천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로크처럼 인간의 마음을 아무것도 없는 '공백'으로 생각한 역사는 매우 오래다. 보통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영혼에 관하여De anima>에서 인간의 마음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서판書板'에 비유한 것을 최초로 꼽는다. 그래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비판하는 글에서 로크의 백지장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관 지어 '비어 있는 서판'이라는 뜻의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로 표현했다. 이 덕분에 타불라 라사는 로크의 백지장 개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텅 비어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잠재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는지에 대한 논쟁을 두고 비유적으로 '빈 서판' 대 '찬 서판' 논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특성이 본성적인 것인지, 양육에 의한 것인지를 따지는 '본성nature' 대 '양육nurture' 논쟁과도 일맥상통한다. (49~50쪽, 마음은 '백지장'인가?)

촘스키에게 마음은 선험적 능력으로 가득 채워진 '장기'를 대변한다는 서술이 눈에 띈다.

스키너는 동물 실험을 이용해 인간의 행동을 연구한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 1849~1936와 왓슨 등 행동과학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이론을 기반으로 한 경험주의empiricism를 옹호한 반면, 촘스키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본성주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스키너에게 마음은 자극과 반응에 의해 후천적으로 채워져야 할, 텅 빈 백지장을 대변하고, 촘스키에게 마음은 선험적 능력faculty으로 가득 채워진 '장기organ'를 대변한다. (50쪽, 마음은 '백지장'인가?)

스키너에 따르면, 유기체는 긍정적인 결과가 수반되는 반응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어 특정한 반응을 나타내는 횟수가 증가하는데, 이것이 강화에 조절된 결과다. (60쪽, 마음은 '백지장'인가?)


1957년 스키너의 <언어행동론>이 출간되자마자 촘스키는 이책에 대해 낱낱이 반격하기 시작했다. 1959년 촘스키가 '스키너의 <언어행동론> 서평A Review of B. F. Skinner's Verbal Behavior'를 '랭귀지Language'에 발표한 것은 행동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일이었다. (…) 촘스키는 '강화'나 '유추' 같은 개념은 정의조차 되지 않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한층 더 나아가, 언어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외부적 조건들을 고려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도그마에 불과"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63~64쪽, 플라톤의 문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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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



철학이 다루는 영역은 세상만큼이나 넓다. 사실상 어떤 학문에라도 '철학'을 갖다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샌델은 자신의 전공분야인 '정치철학'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다시 말해 이라는 고상해보이는 학문과는 어울리지 않게 진흙탕 싸움을 곧잘 연상시키는 정치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정치철학은 종종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인다. 원칙과 실제 정치는 완전히 별개이며, 우리의 이상을 '추구하며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대개는 그 노력이 허물어지고 만다.

어떤 점에서 정치철학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철학이 애당초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관행들과 제도들은 이론의 구현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과 연관되는 것이다.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정의와 가치, 좋은 삶의 본질과 관련한 문제들에는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모종의' 답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다. (175~176쪽)

옳음과 좋음. 샌델은 앞에서도 이 용어를 등장시켰는데 한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리, 즉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자유주의와 공리주의가 나뉜다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말해 공리의 최대화를 최선으로 보는 공리주의는 좋음을, 칸트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는 옳음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샌델은 옳음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기획이 현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종국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정한 도덕적·정치적 비전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 보겠다. 내가 말하는 특정한 비전은 자유주의 비전의 일종으로서, 대부분의 자유주의 비전이 그렇듯 정의와 공정성, 개인의 권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그 핵심 논제는 다음과 같다. 정의로운 사회는 결코 특정한 목적을 강요하지 않으며 시민들이 모두 동등한 자유를 갖고 각자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는 선(옳음)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전반적인 복지를 극대화하거나 덕성을 장려하거나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이 아니다. 선에 우선하며 선과는 별개의 도덕적 범주인 '옳음'이라는 개념을 따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정의로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추구하는 '텔로스'telos(목적, 목표, 본질)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갖가지 목표와 목적들 가운데서 미리 정해놓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올바른 법률 체계 안에서 시민들이 모두 동등한 자유를 갖고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이상은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정리된다. 옳음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첫째, 개인의 권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이러한 점에서 공리주의와 대립된다), 둘째, 이러한 권리를 서술하는 정의 원칙들은 결코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전제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이러한 점에서 목적론적 관점과 대비된다).

이것은 현대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에 상당 부분 녹아 있는 자유주의로서, 롤스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졌고 칸트에 의해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같은 비전이 아니라 그와 관련해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가지 사실이다.

첫 번째는 그것이 강력하고 깊은 철학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옳음이 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철학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실패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이 자유주의 비전은 철학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천하는 비전이라는 사실이다. (…)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철학으로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정치 상황을 진단할 수 있다. 요컨대 첫 번째는 철학적 힘이고 두 번째는 철학적 실패이며 세 번째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오래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 불안정하게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77~178쪽)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국내에서 매우 유명해졌지만 원래 정의의 문제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가 워낙 학문적으로 지대한 업적을 쌓아놓았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실린 샌델의 약력을 보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돼 있을 정도다. 그럼 롤스는 무엇을 했는가.

앵글로 아메리칸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험적 주체라는 토대는 오히려 익숙한 윤리에 생소한 개념을 갖다 붙이는 셈이 된다. 순수이성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도덕의 우월성을 지지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어쨌든 그것이 바로 롤스의 프로젝트이다.

롤스는 권리가 최우선이라는 논리를 모호한 선험적 주체의 개념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한다. 칸트의 관념론적 형이상항은 도덕적·정치적 이점을 갖고 있지만 지나치게 선험적인 것에 치중하며 인간적인 상황을 배제함으로써 정의의 우월성에 도달한다. (…) 따라서 롤스의 프로젝트는 독일적인 모호성을 앵글로아메리칸들의 기질에 맞는 원리로 바꿈으로써 칸트의 도덕적, 정치적 가르침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입장의 역할이다. (182쪽)


롤스가 주장하는 정의의 원칙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모두에게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허용할 것, 둘째는 가장 불리한 사회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회·경제적 불평등만을 허용할 것이다.

롤스는 이 두가지 원칙을 주장하면서 두 가지 익숙한 대안, 즉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반박한다. 공리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점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무엇보다도 전반적인 복지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그 자체로 하나의 인간처럼 취급한다. 공리주의는 갖가지 다양한 욕구들을 하나의 욕구로 융합하며, 개개인에게 만족을 분배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 공리주의자들이 개인 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행운의 임의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장경제에 기인하는 분배는 무조건 정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든 그것이 사기나 절도 또는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이유로 모든 재분배를 반대한다. 롤스는 재능과 자산의 분배, 심지어는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것을 안겨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더 적은 것을 안겨준 분배조차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운의 문제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186~187쪽)

앞서도 말했듯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비해 자신의 사상을 좀 더 적극적이고 자세하게 펼친다. 아래는 롤스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정의라는 것이 특정 공동체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과 결부될 수 밖에 없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도덕과 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즉 가족과 공동체와 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도덕과 확신의 힘은 어느 정도는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도덕은 그저 내가 보유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가치들과는 다르다. 자발적인 책임이나 모든 인간에게 따르는 '자연적 의무'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러한 도덕과 확신은 내가 사회적 합의 때문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정의해주는 애착과 책임감 때문에 빚을 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190쪽)

샌델은 책의 상당부분을 흔히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존 듀이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켜주고 미국적 전통이 가능하게 한 것이 듀이라는 설명이다.

듀이의 철학은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당면한 엄격한 양자택일의 문제(과학과 종교, 개인주의와 공동체, 민주주의와 전문가정치 사이의 융통성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완화시켜주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러한 구별을 흐릿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과학은 우리가 경험해나가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 꼭 신앙과 대립각을 세우는 게 아니라고 썼다.

개인주의는 마구잡이로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특유의 역량을, 그것을 끌어내는 '공동생활' 속에서 펼치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합리와 불합리를 불문한 채 다수결을 따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전문가답게 판단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했다. (203쪽)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동시대의 많은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달리 듀이는 정치이론의 기반을 근본적인 권리나 사회적 계약에 두지 않았다. 그는 시민적 자유를 선호했지만 다수결의 원칙을 제한하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거나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사생활 영역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듀이의 자유주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자유란 개인들 저마다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자유의 문제는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요구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찾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내적 삶은 물론 외적 삶까지 길들이고 지도하는 전체적인 사회질서를 어떻게 확립하는가의 문제"이다. (207쪽)

다시 이어지는 롤스와 정의론에 대한 기나긴 설명. 롤스의 <정의론>을 언젠가는 읽어보아야 할 터인데... 지금은 마치 내가 <정의론>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찾아가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정치철학을 다룬 저서 중에 지속적인 논쟁을 불리일으킨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존 롤스의 <정의론>이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그 저작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출발점이 되는 첫 번째 논쟁은 공리주의자들과 권리지향적인 자유주의자들 간의 논쟁이다. (…) 롤스의 저서가 불을 지핀 두 번째 논쟁은 권리지향적인 자유즈의 내에서 발생한 논쟁이다. 만약 개인의 특정한 권리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그 권리는 어떤 권리인지 묻는 일이 남는다. (…) 1970년대 학계를 달군 자유지상주의자(로버트 노직,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롤스) 간의 논쟁은 미국 정치학계에서 뉴딜정책 이래로 친숙해진 시장경제 옹호자들과 복지국가 지지자들 간의 논쟁과 일치한다.

롤스의 저서가 유발한 세 번째 논쟁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 모두 가졌던 가정을 중심으로 한다. 이 가정은 좋은 삶에 대한 여러 개념들 사이에서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권리지향적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정의가 정당성을 갖추려면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칸트, 롤스 그리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에서 중심이 되는 이러한 생각은 옳음(권리)이 좋음(선)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218~219쪽)

칸트의 경우처럼, 롤스의 경우에도 옳음은 두 가지 의미에서 좋음에 우선하며,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첫째, 개인의 특정한 권리가 공공선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 둘째, 인간의 권리를 명시하는 정의 원칙들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옳음은 좋음에 우선한다. 롤스의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두 번째 주장이다. 이 논쟁은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이라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으로 지난 10년 동안 가열되어왔다. (219쪽)

옳음이 우선한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정의가 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선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시각에서 접근해보면, 정의는 좋은 삶과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문화와 전통에서 나타나는 선의 개념과 관련 없이는 정의와 권리에 대해 깊이 논의할 수 없다. (…) 롤스는 <정의론>에서 옳음이 우선한다는 생각을 개인에 대한 자원주의 개념(넓게는 개인에 대한 칸트식 관점)과 별부시켰다. 이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기가 가진 욕구의 총합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자연이 부여한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실현할 때 완벽해지는 인간 또한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로서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도덕적 의무에 구속받지 않는다. 이는 중립적인 체계로서의 국가라는 이상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220~221쪽)

샌델은 학문적으로 롤스를 비판하는 쪽에 서 있지만 선배 학자이자, 하버드대학교의 선배 교수였던 샌델과의 추억을 소개하며 그를 '신'에 비유하는 경의를 표했다.

롤스는 학생들과 후배 교수들에게 친절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나는 1975년 옥스퍼드 대학원을 다닐 때 처음으로 <정의론>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나의 논문 주제가 되었다. 이후 나는 자유주의에 관한 그 위대한 저서의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하버드대 정치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런데 하버드에 도착하자마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반대편에서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 존 롤스, R-A-W-L-S입니다." 신께서 몸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모를까봐 자기 이름의 철자를 일일이 말해주는 것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267쪽)

아래는 롤스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자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주의라는 레테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만 가지고는 사회가 형성, 유지될 수 없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들도 이러한 논리적 비판을 일찍부터 의식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계약'이라는 최초의 사회결성 계기를 가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사회적 계약이라는 것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게 만드는 그것에 천착한다.

공화주의의 핵심 이론은 "시민의 자유는 자치를 공유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고는 자유주의적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정치 참여는 개인이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치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시민들에게 공공선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며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선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목적을 선택하고 타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존중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공에 대한 지식과 전체에 대한 소속감, 책임감, 현재 기로에 놓여있는 공동체와의 도덕적 유대가 필요한 것이다.
(271쪽)

샌델은 미국 정치에서 자유주의 진영인 민주당이 보수주의에 밀리고 있는 것은 '도덕'의 문제를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책 서두의 주장을 다시 꺼내 공동체와 도덕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선거권도 중요하지만 자유주의에는 선거권을 넘어서는 자치의 비전이 필요하다. 나아가 국가와 개인의 사이를 중재하는 풍부한 시민적 자원을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의 비전을 세워야 한다.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은 그들만의 연방주의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정치적 책임에 대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민주당은 연방주의 이론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국민의 기본 권리를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역공동체가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서 큰 역할을 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 평등과 모든 시민이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와 함께 학교에 대한 지방정부의 통제권을 강화할 방법 등이 있다.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전례 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본과 대기업의 무소불위, 적대적인 노사관계를 다룰 정책이 필요하다. 자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공철학은 적자예산과 세율 등의 거시경제가 아니라 경제구조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또 그러한 공공철학은 GNP를 최대화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치가 가능한 공동체의 관점에서도 다룰 수 있다. (…)

넷째, 도덕적·종교적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도덕적 의미와 공동선이 결여된 공공생활은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편협한 태도를 불러온다. 여태껏 도덕적 다수파가 보여주었듯이, 도덕적 자원을 적절히 활용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그 자원을 감소시키는) 정치는 편협한 도적주의를 강효하려는 이들에게 잠식당할 위험이 크다. (…)

최근 자유주의는 공동선의 비전을 제시하는 과제에 실패해 비틀거렸고, 이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미국 정치의 가장 잠재성 있는 자원을 양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치와 공동체의 공공철학은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자원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게 해주며, 도덕적, 정치적 진보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317~318쪽)

왜 도덕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한국경제신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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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


(에셔의 작품인데 본문과는 별상관이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전공으로 옮아갈 차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의를 엮은 것이라고 하는데,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의'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법과 칸트-롤스의 자유주의적 접근법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책을 끌고 가고 있다. <왜 도덕인가?> 역시 공리주의와 칸트식 자유주의가 공공의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대비하고 있다. 먼저 공리주의를 보자.

어떤 면에서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의 이상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지닌 가치들을 평가 없이 환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선호도를 아무런 평가 없이 합산하는 것은 관대한 태도이며, 나아가 민주적인 태도이다. 민주주의의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들의 표를 모두 동등하게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계산법은 얼핏 보기에는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 몰려드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환호하는 로마인들의 수가 많다면 기독교인들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로마인들의 쾌락의 총합이 기독교인들의 고통의 총합을 넘어설 것이다. 절대다수가 소수의 종교를 혐오해 그것이 금지되길 바라는 경우, 선호도의 평균을 내보면 관용이 아닌 억압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공리에 이바지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불확실하며 항상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약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다수의 뜻은 그 자체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리주의 철학은 자유주의 원칙에 적절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주장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칸트의 주장이었다. 그는 공리주의와 유사한 경험주의는 도덕의 근거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도구적인 관점에서 자유와 권리를 옹호할 경우,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존중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할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여기기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158~159쪽)


다음은 이른바 '칸트파 자유주의' 진영이다.

칸트파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하는 해법은 '옮음(정의)'과 '좋음(선, 가치)'을 구분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권리 및 자유의 틀과, 사람들이 그 틀 안에서 선택해 추구하는 선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공정한 틀을 유지하는 것과 특정한 목적을 지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인생의 목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언론 자유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삶이 무관심한 삶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이유로 혹은 언론 자유가 전반적인 복지를 증대해줄 거라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칸트 철학의 관점에서는 전자의 옹호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중립성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160쪽)

칸트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옮음이 좋음에 우선한다. 이는 두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개인의 권리가 전체의 선을 위해 희생될 수 없다. 둘째, 개인의 권리를 조건으로 하는 정의는 결코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권리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체 복지를 극대화하거나 선을 증진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과 동등한 자유를 갖고 나름의 가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1쪽)

그렇다면 이번에는 샌델 자신이 동조하는 공동체주의의 주장을 살펴보자.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 개념을 따르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현대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공동선의 정치를 옹호한다. 그들은 칸트에 대한 헤겔의 반론들을 상기시키며 권리가 선에 우선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총하는 그들은 공동의 목표와 목적을 배제하고는 그 어떤 정치제도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배제하고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62쪽)

권리 기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자신을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로,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완전히 분리된 자아를 가진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역할들 가운데에는 정체성(일테면 한 국가의 시민, 어떤 캠페인의 참가자, 어떤 대의의 지지자)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의해 정의된다면 우리는 또한 그러한 공동체를 특징짓는 목표와 목적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163쪽)

샌델은 이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이자 국가가 반드시 특정한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화페와 시장이라는 실질적인 아이템에 대한 접근법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하이예크 등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와 롤스 등 평등주의 자유주의자가 대비된다.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사경제를 옹호하고,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기업을 바탕으로한 경제와 관료국가에서 발생하는 힘의 집중을 우려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민족국가는 아테네의 도시국가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현대 생활의 다양성과 규모를 감안하면 이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는 기껏해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를 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는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창궐한다고 대응한다. 나 역시 공동체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공공생활이 약해지고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미해질 때, 전체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중정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도덕적·정치적 과제는 바로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66쪽)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교환의 매개체인 돈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돈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주의자들은 모두가 같은 양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돈이 분배의 공정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응수한다. 누구는 많이 가지고 누그는 적게 가지는 한 어떤 이는 강자의 입장에서 거래를 하고 어떤 이는 약자의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

따라서 소위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공정해질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평등주의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든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경우라도 거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평등은 끝난다고 말한다.
(168쪽)

샌델이 마이클 왈저를 통해 제시하는 화폐와 시장에 대한 접근법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확연히 달라 보인다. 정치와 정의의 임무는 어떤 재화가 어떤 영역에 속하는지 결정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왈저는 좀 생소한 이름이다.(왈저에 대한 위키피디아 설명) 그런데 이름을 몇번 입속으로 말해보니 희미하게 잔상이 떠오른다. 작년에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하다'는 책이 번역돼 나온 적이 있었는데 혹시하는 생각에 확인해보니 역시나 마이클 왈저의 저서였다. '정의로운 전쟁론'은 버락 오바마가 견지하고 있는 노선이기도 한데 당연히도 매우 논쟁적인 주장이다. 당시 아쉽게도 이 책을 읽지 못하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마이클) 왈저는 (저서인 <정의의 영역>에서) 자유지상주의자와 평등주의 간의 논쟁 기반을 바꿈으로써 비평가와 옹호자 모두로부터 평등 문제를 구제해낸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돈의 분배보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이것이 정의의 영역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이 된다. 그는 재화마다 나름의 원칙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고, 명예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힘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책은 적임자들에게, 사치품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과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의 은총은 독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왈저는 불평등한 부는 요트나 고급 음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영역을 지배하려는 돈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

하지만 왈저 또한 인정한 것처럼, 영역이라는 아이디어만으로 재화를 분배하는 방법까지 알 수는 없다. 우리의 정치적 논의 대부분은 어떤 재화가 정확히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다. (168~169쪽)

(계속)

p.s. 설 연휴가 다가왔는데 몸살기운이 조금 돈다. 며칠째 밤에는 술을 마셔댔더니 탈이 나는 모양이다. 음력 새해엔 술을 좀 줄여야 할텐데 '설 쇠고 봅시다'라며 잡아놓은 약속들이 빽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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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

왜 도덕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한국경제신문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대학교 강의 동영상이 연초부터 EBS에서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재진입했다. 한번 힘이 빠지면 다시 치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2위로 주저 앉히고 다시 올라간 것을 보면 역시 텔레비전의 위력이 크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난이도'(?)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 예상대로 논술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의 필독서로 지정돼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지인 한분은 자기는 이 책을 읽다가 한쪽 한쪽 넘기기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아들이 학교에서 읽어오라고 했단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낙약의 종이값을 올리는 책으로 등극하자 아니나 다를까 샌델의 다른 책들이 연이어 소개됐다. 나왔을 당시 읽지는 못하고 챙겨뒀던 것이 <왜 도덕인가?>이다.

책은 전체 3부로 이뤄졌는데 완결성 면에서는 약간의 흠이 보인다. 1부는 복권가 도박, 공공기관의 상업적 브랜드화, 온실가스배출권 거래, 소수집단 우대정책 등 미국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한 칼럼에 가까운 글들을 모았다. 2부와 3부는 말 그대로 정치 영역에서의 도덕이라는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 간간히 학술적으로 꽤 깊이 들어간 부분도 있다. 그래서 시사적인 1부와 학술적인 2부와 3부가 약간 언밸런스 하다는 느낌을 준다.

샌델 자신은 이런 호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지만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론 일반에 대한 학부생 강의를 엮은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샌델의 주장은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책 맨 뒤의 10쪽 정도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했다. 그러나 <왜 도덕인가?>는 공동체주의자로서의 샌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현실에서 개인주의적 보수주의(공화당)와 자유주의(민주당) 사이에서 샌델은 자신의 위치를 민주당 쪽에 가깝에, 다시 말해 자유주의에 가깝게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결여한 것, 보수주의가 적극 활용하면서 현실정치에서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 바로 정치와 법률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자유주의의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것이 샌델의 목표이다.

일독을 하긴 했지만 밑줄친 부분을 다시 보니 다소 난삽하게 밑줄이 그어진 감이 없지 않다. 며칠에 걸쳐 주로 지하철에서 읽다보니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국민은 고객이 아니다. 그리고 미주주의는 단순히 국민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올바르게 시행된 정치는, 국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올바른지 판단한 후 그 욕구를 수정하도록 이끈다. 고객과 달리 국민은 때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와 상업의 차이점이며 애국심과 브랜드 충성도의 차이이다.
정부가 만화 캐릭터와 최신 스타일의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정부 지지도를 높이는 데는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공공기관이 갖는 권위와 사명의식을 해친다. 그리고 공공기관이 주어진 임무를 망각하면 시민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의 힘과 상업적 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42쪽)


아마도 영광에 관한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노동과 보상을 둘러싼 논쟁일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복지에 반대하는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회복지에 소비되는 돈을 아깝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수여하는 기준과 관련해 사회복지에 담김 메시지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배풂'을 근거로 사회복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소득이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시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척도 역할까지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이 흘리는 땀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진다. 물론 사회복지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공정성과 자격, 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78쪽)

정치철학자인 샌델의 책이 논술 또는 로스쿨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특히 유용하다면 바로 아래와 같은 대목 때문일 것이다. 샌델은 미국에서 크게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문제, 즉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의 사안에 대해 찬반론을 살펴본 뒤 상당히 세련된 논리와 비유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배아를 출발점으로 삶이 시작된다. 인간이라는 이유 자체로 우리의 삶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침범당할 수 없는 신성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연령이나 생명의 초기 단계에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 중에 어느 순간부터 인간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배아도 완전한 성인과 마찬가지로 침범당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 누구나 배아를 출발점으로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곧 배아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어보자. 모든 떡갈나무는 한때 작은 도토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토리가 곧 떡갈나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의 소유였던 도토리 한 알을 뒤뜰의 다람쥐가 먹어버리는 경우와 떡갈나무가 폭풍우에 쓰러져 죽는 경우에 내가 경험하는 상실감은 엄연히 다르다. 성장 단계로 따지면 서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지만 도토리와 떡갈나무는 다른 존재다. 배아와 인간도 마찬가지다. 지각력을 지닌 존재는 그것을 갖지 않은 존재와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 또한 무언가를 경험하고 의식할 수 있는 존재는 그렇지 못한 존재보다 더 높은 수준의 권리를 갖는다. (87쪽)


아래와 같은 언술은 한국의 진보파들에겐 분명히 불편하게 여겨질 것이다. 특히 군부독재 정권을 거치며 국가가 어떤 도덕적 담론을 제시하고 국민을 이에 맞추도록 무자비하게 강요했던 경험을 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실 이 때문에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한국의 진보파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두고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한 신문기자는 '기이한 현상'이라며 샌델을 우파 철학자로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파 시민과 우파 지식인들에게 샌델에 관심을 가지라는 은근한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샌델에 대한 비판이 가해진다면 이 부분이 핵심이 될 것이다.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리주의와 칸트에서 존 졸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사상을 검토,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화주의, 공동체주의를 현대의 사상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애쓴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도덕적 성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판단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미덕의 정치에 저항했다. 공화당이 낙태를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내기도를 장려할 때, 자유주의 진영은 정부가 도덕을 법률화하거나 국민의 도덕성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통치술이 영혼통치술로 전환되는 곳에 강압 정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강요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정치가 도덕과 종교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철학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도덕 문제에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인권법은 도덕을 법률로 규정했으며, 그래야 마땅한 것이었다. 인권법은 식당 내의 인종분리처럼 증오심에서 기인한 행위를 금지했고 나아가 시민들의 도덕성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29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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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만주름